따뜻하거나 차가운 색상,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레이어, 거칠거나 섬세한 붓질 등은 제한된 화면 안에서 혼재되어 공존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요소들은 화면 안에서 복잡하지만 균질하며, 즉흥적이지만 규칙적인 넝쿨 식물의 패턴과도 같은 유기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나의 회화는 단절되거나 분절된 양상을 띄기 보다는 어디에선가 전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원환체(圓環體, Torus)와 비슷하다.
화면을 만드는 이러한 장치들을 나는 ‘레이어’와 ‘마스킹(Masking)’작업을 통해 조절한다. 평면을 가로지르며 차곡차곡 쌓여진 브러쉬 스트로크 위에 마스킹을 하고 다시 덮는다. 그리고 수차례 이 작업을 반복한다. 결과물로 보여지는 각각의 조형요소는 보통 3개 이상의 레이어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브러쉬 스트로크나 형태의 포지티브/네거티브 스페이스, 그리고 날카로운 아웃라인으로 인하여 경계가 구분된다. 붓질로 인해 만들어진 하나의 레이어가 또 다른 붓질의 실루엣에 의해서 부서지게 되며, 한 레이어의 포지티브 스페이스를 이루던 요소가 또 다른 레이어의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정교한 후작업으로 층간의 순서가 흐트러지기도 한다. 펜로즈(Penrose)의 계단을 연상시키는 레이어 구조는 3차원의 공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구조를 회화라는 평면 위에서 실현시킨다. 이를 통해 각각의 요소들은 시각적인 착시 현상을 자아내며, 공간 안에서 혼재하는 동시에 공존을 이룬다.
나는 제한된 공간 안에 다양한 조형요소를 혼합하여 공존시킨다. 동시에 전체가 아닌 이들의 일부만을 노출시킨다. 그리고 이런 조각들이 새로운 조형요소가 되어 화면을 채워나간다. 나는 이처럼 화면 안에서 재탄생된 요소들이 서로 협업하여 공존하는 나의 회화를 ‘Melting Pot’이라고 부른다.
이번 아트스페이스 퀄리아에서는 Melting Pot의 연결 선상에 있는 BUSH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작가노트
Warm and cool colors, transparent and opaque layers, and rough and delicate brush strokes coexist, mixed together within the limited frame. These opposing elements appear as organic forms on the canvas like a pattern of vines that is complex yet uniform and impromptu yet regular. My painting is similar to a complex torus that appears connected at some point rather than broken off.
I create these elements upon the canvas through layers and masking. I pile up strokes one by one across the flat surface, apply masking tape over them, and paint on top of that. I repeat this process several times. Each formative element in the resulting work generally consists of three or more layers. The boundaries are distinguished by brush strokes, positive/negative spaces, and sharp outlines. A layer created by a stroke is broken by the silhouette of another stroke; an element of the positive space of a layer forms the negative space of another layer. The hierarchy of accumulated layers is also disturbed by elaborate post-work. The structure of layers, reminiscent of the Penrose stairs, is made possible on the flat surface of the canvas, a structure that is unrealizable in three-dimensional space. As a result, each element produces optical illusions as they are all entangled and exist side by side in the same space.
I mix up various formative elements in a limited space and make them coexist. At the same time, I only expose parts of them, not revealing their true depths. These parts then became new formative elements and fill the frame. Thus, I give the name “Melting Pot” to my painting in which elements, reborn within the frame, collaborate and coexist with each other.
Artist Statement
흔적을 축적하는 혼혈의 ‘시간 회화’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이대희의 작업은 회화이다. 그것도 추상 회화이다. 그것은 한때에 모더니티의 궁극이었으나 20세기 중후반 죽음을 선고받고 한 두 차례 종말의 나락까지 떨어졌던 터라, 21세기에 이른 오늘날에는 이미 구태처럼 취급받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오늘날 추상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조형 언어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21세기 추상 회화의 장에서는, 그린버그가 주창했던 ‘평면성’, ‘매체적 속성’에 버금가는, 새로운 거시적 담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요원한 일처럼 되어 버렸다. 이것은 분명 부정적 진단이지만, 그럼에도 긍정적 관점까지 저버리지는 않는다. 추상 회화 전반을 싸고 있는 혁명적 담론이 사멸한지 오래 되었다고 단언할지라도, 개별 작가들마다의 독특하고도 미시적인 추상 미학이 절대 사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개별 작가들에 대한 미시적 탐구는 담론화된 추상 회화에 피를 통하게 하고 뼈와 살로 생명력을 덧입히는 주요한 근간이 된다. 이대희의 추상 회화는 이러한 지점에서 읽힌다.
I. 멜팅 포트 - 혼혈의 회화
그의 최근 추상 회화의 작품명은 거의 대개 ‘멜팅 포트(melting pot)’이다. 그것은 사전적 의미로는 광석을 녹여서 쇠붙이를 뽑아내는 가마로서의 ‘용광로’나 ‘도가니’를 지칭한다. 또한 그것은 그가 자신의 청년기를 이방인으로 보냈던 “여러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있는 미국”을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혼성(混成), 혼혈 등 이질적인 두 요소 이상이 뒤섞이는 이종혼합(異種混合)을 아우르는 이 용어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들을 함께 포함한다. 하이브리드, 컨버전스와 같은 테크놀로지의 면모가 이끄는 첨단의 융복합적 미래가 한 편에 있다면, 반대편에는 순결하지 못함, 혼혈과 잡종, 혼동, 혼란과 같은 생물학적이고도 사회학적인 비판 의식이 과거라는 시간과 함께 자리한다.
‘멜팅 포트’, 이것은 이대희의 작품명이자, 그가 주목하고 있는 최근 작품의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이 용어는 앞서 언급한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함께 아우르면서도 ‘변화를 지속하는 과정’이라는 유동적인 존재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다! 그의 작품은 순수하지 못한 잡종이지만 한편 상생을 화두로 한 융합의 하이브리드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언제나 변화 중이다. 보라! 그의 작품은 콜라주(collage)와 데콜라주(decollage)가, 데칼코마니(decalcomanie)와 프로타쥬(frottage)가, 데벨로페(developper)와 엥벨로프(envelopper)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양자를 하나의 장(場) 안에서 뒤섞는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융합(fusion) 또는 통섭(consilience)과 맞물린 채 화려한 변주를 주도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얇디얇은 ‘마스킹 테이프(masking tape)’이다. 깔끔하게 양끝을 둥글게 모서리를 처리하거나, 더러는 찢어진 포스터처럼 파열의 형상으로 마감한 마스킹 테이프는 화면 위에 물감을 올리는 붓질이 거듭될수록 하나둘씩 그 숫자를 증가시키면서 화면을 점차적으로 점유한다.
이윽고 시간과 시간이 겹쳐지고 흔적과 흔적이 만나면서 얇은 물감 층이 여러 겹으로 작가의 마음에 흡족한 상태로 쌓이면, 화면 위에 차례로 증식된 모든 마스킹 테이프를 한꺼번에 뜯어낸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마스킹 테이프를 화면에서 ‘일시에 제거’하는 데콜라주가 될 터이나, 실제 효과는 유선형의 혹은 파상형의 마스킹 테이프 아래 숨어 있던 ‘중첩된 물감들의 시간의 흔적을 한꺼번에 가시화’하는 데벨로페(developper)의 조형 언어가 된다. 마스킹 테이프가 물감을 겹으로 칠해 바르면서 순차적으로 붙여 나간 것이기에 그 붙이기 전까지 집적되었던 물감 층의 두께와 양상은 모두 제각각이다. 즉 캔버스 바로 위 얇은 물감 층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스킹 테이프와 물감이 덧발라져 두터워진 물감 층을 화면 위에 모두 함께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그것은 오래된 과거와 최근의 현재를 함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II. 축적되는 흔적 - 시간의 회화
‘멜팅 포트’라 불리는 이대희의 ‘혼혈의 회화’는 형식적으로는 물질의 덧칠과 겹침이 주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그 혼혈성이라는 것이 ‘물질의 뒤섞임’만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에 따른 다양한 이질적 행위, 즉 덧붙이기와 오려내기, 지우기와 드러내기, 감싸기와 펼치기와 같은 대립적 개념들을 쓰다듬고 용인함으로써 서로를 통섭, 융합한다는 것이다.
이대희에게 있어, 시간의 축적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회화와 달리 이전의 회화는 대개 공간과 구조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자동차나 중장비 차량처럼 기계 부속으로 연결된 구조들과 천장, 벽, 바닥이 놓인 건축적 구조들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현실계의 3차원 공간 속에서 실험하는 건물과 풍경에 대한 관심들이 그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대개 XYZ축 위에 종적, 횡적으로 연결된 실제의 풍경과 현실의 공간들을 분절하고 해체시켜 현실과는 전혀 다르거나 이상야릇한 낯선 풍경과 공간으로 재구축해 내는 것들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느다란 펜으로 현실의 기계 구조들과 도시 풍경 속 공간들을 묘사하거나 액션 페인팅처럼 흩뿌려진 물감의 흔적으로부터 새로운 기계 생명체들을 살려내는 것과 같은 이미지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그의 회화에서의 초기적 관심은 현실의 공간과 구조를 해체하고 비현실의 낯선 공간과 구조들을 재창출하는 이른바 ‘공간(적) 회화’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점차 회화의 조형적 언어의 다양성을 실험한다. 단순한 색점들의 배열과 문양 배치에 대한 실험, 곡선과 직선의 연결과 배치에 대한 실험, 번지기, 프로타쥬, 데칼로코마니 등의 다양한 기법의 회화적 실험들이 그것이었다.
그의 다양한 회화적 실험들은 그의 작품을 화면 안에서의 물질의 뒤섞임과 사건들이 연접하는 ‘시간(적) 회화’ 혹은 ‘시간의 회화’로 변하게 만든다. ‘물질의 뒤섞임과 사건들의 연접’은 그의 ‘지난한 노동’이 필수적인 ‘느린 듯 수고스러운 회화 행위’로부터 기인한다. 물감의 흔적을 집적해 나가는 것이 관건인 만큼, 그는 캔버스의 표면을 꼼꼼하게 방수(防水)된 바탕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물감을 도포하고 사포로 고르게 세밀하고 갈아낸다. 캔버스 표면 위에 지속적으로 물감을 올리는 과정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세밀하게 오려 붙이는 일이란 여간 쉽지 않다. 그의 ‘느린 듯 수고스러운’ 회화 행위는 이처럼 첫 단계부터 막대한 시간의 투여와 지난한 노동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대희의 복잡다기하지만, 형체가 없는 ‘무형의 회화 행위’는 캔버스 표면 위에 유형의 물감들로 흔적을 남긴다. 물감을 끌고 지나간 붓질에 따라 그리고 물감의 농도에 따라 흔적들을 다르게 표면 위에 남는다. 그 흔적들이 구체적으로 또 어떻게 다른 흔적과 겹쳐지면서 물질의 유형을 만들어 나갈지 예단하는 일은 우리로선 쉽지 않다. 그의 회화에서 끝을 처음부터 정한 바 없고, 수많은 우연들을 받아들이는 창작의 과정 속에서 작가가 자연스럽게 그 완성 시점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회화에는 ‘미래에 대한 예측불가능성’과 함께 ‘열린 가능성’들이 함께 자라난다고 평할 수 있겠다.
III. 흔적의 지속 - 회화의 실존
그의 ‘시간(적) 회화’ 또는 ‘시간의 회화’에는 현재의 창작 과정 속에서 미래가 들어오면서 과거가 되는 지속적인 현재진행형의 움직임이 작동한다. 유념할 것은 미래가 현재 속에 들어오면서 과거가 되는 ‘시간의 축적’은 과거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화 행위는 행해진 순간 과거가 되지만, 그것의 축적과 축적의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것을 유념할 때, 그의 회화 행위는 ‘축적되는 과거’를 연장하고 지속하는 ‘현재진행형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대희가 유념하고 있는 ‘물리적인 물감의 흔적’ 역시 과거의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필수적으로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지만 그것이 꼭 과거의 것이었다고 한정할 수 없다. 과거-현재-미래 사이를 연결하는 운동으로서의 지속이 그의 작업에 있어서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이대희의 작품에서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체험적 시간(temps vecu)’으로서의 ‘지속(Duree)’의 개념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실존을 구성하는 시간성(Zeitlichkeit)의 철학 그리고 가다머(Hans Georg Gadamer)의 ‘변화 속의 지속’이라는 ‘예술 작품의 시간성(Die Zeitlichkeit des Kunstwerkes)’과 관련한 미학들을 읽어낸다
보라! 베르그송의 지속이 과학적, 수학적, 추상적 개념의 시간과 별리한 삶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탐구의 결과였듯이, 이대희의 시간 회화는 작가의 신체적 노동과 호흡이 시간의 궤적에 따라 흔적을 남긴 결과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시간성이 과거-현재-미래의 연결 속에서 인간 실존의 현존재를 구성하듯이, 이대희의 작품이 견지한 시간성은 언제나 세 요소가 한꺼번에 작동하는 현재진행형의 운동으로서의 ‘시간 회화’를 구성한다. 미래의 인간 죽음의 가능성을 현재에 소환하는 하이데거의 시간성에 대한 성찰이 ‘거기-있음(Da-sein)’의 존재라는 실존을 밝혀내듯이, 미래의 예측 불가능과 열린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젖히는 이대희의 ‘시간 회화’가 견지한 시간성이란 ‘거기 있음’이라는 예술 작품 자체의 실존을 증명해 보인다.
IV. 에필로그 - 인터메쪼의 미래
생각해보자. 가다마의 견해대로라면, 하나의 예술 작품이 변화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견지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의 미적 가치와 의미의 연속성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모든 예술 작품에 대한 존재를 규명하는데 있어 널리 적용되면서도, 이대희의 최근 추상 회화가 지닌 미적 가치를 규명하는 유의미한 개념이 된다. 추상은 20세기 조형 언어라고 믿고 있는 다수의 관객에게 이대희의 익숙한 추상의 조형은 어떤 면에서 특별한 도전이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익숙한 조형과 오버랩시키고 있는 그만의 낯선 조형 언어와 더불어 이대희가 천착하고 있는 독창적인 조형 미의식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판화와 회화 사이의 혼합, 대립된 개념들의 융복합과 혼혈로서의 멜팅 포트, 비순수의 잡종이지만 상생을 화두로 한 융합의 하이브리드, 해체와 재구축의 연쇄로 만들어진 시간의 회화, 현재진행형으로 흔적의 생산을 지속하는 추상 회화, 흔적을 축적하고 시간의 지속이 직동하는 예술 작품의 현전과 실존에 관련한 문제의식’ 등은 그의 작품이 함유하고 있는 미의식이다.
이대희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추상 회화는 오늘날 회화의 현장에서 하나의‘사이 존재(inter-etre)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처럼 읽힌다. 그것은 분명 양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으나 탈주의 선(ligne de fuite)을 언제나 욕망하고 있는 변화와 생성의 존재이다. 마치 이대희의 작업에서, 회화의 표면과 지지대의 표면 사이에 존재했으나 종국에 소멸하면서 작품을 완성시킨 ‘마스킹 테이프’의 신묘한 존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