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남초대전 2019.2.11~2.20


떠도는 허기(虛飢)를 위한 달콤한 풍경 -서영남의 Sweet Landscape 글: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얼룩말의 줄무늬는 그것을 쫓는 이의 시선을 흩뜨리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난다. 시선이 품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줄무늬는 시선으로부터 비껴나 더욱 멀어짐으로써 시선의 욕망을 한층 더 자극한다. 얼룩말은 죽을 힘을 다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지만 얼룩말이 달아나는 것은 결코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아니다. 얼룩말은 줄무늬의 생생한 자극과 유혹을 결코 산채로 내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달아나거나 더욱 갈증을 유발하는 무리 속에 섞여 심연의 저편으로 물러남으로써 시선을 쏘는 자의 욕망을 오히려 강화한다. 그 시선의 주인이 배고픈 사자이거나, 혹은 미궁으로 이끄는 줄무늬의 움직임에 끌려 그것을 포착하고자 애쓰는 화가이거나 그것은 똑같다. 비록 사자가 온 힘을 다해 목표로 삼은 얼룩말을 잡아서 포식하기에 성공한다고 해도, 화가가 한 마리의 얼룩말을 아무리 감쪽같이 그릴 수 있다고 해도, 그 얼룩말의 줄무늬로부터 유발되는 바닥 없는 허기는 좀처럼 채워질 수 없다. 그리하여 사자는 결코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줄무늬를 찾아 온통 초원의 숲을 배회하고 화가는 끊임없이 얼룩말의 그림자를 뒤쫓는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얼룩말의 줄무늬는 결코 한 마리의 야생동물이 몸에 두르고 있는 특정한 무늬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것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시선 속에 깃들어 있으며 그것을 욕망하는 마음 안에 덩굴식물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현실이 점점 판에 박은 듯 규칙적으로 퇴행하고 시간과 공간이 무균실과 같은 시공의 격자 안으로 소급되어 갈수록 세계에 대한 시선은 대상을 잃은 채 소실점 속으로 빠져나간다. 이때 화가의 시선은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욕망의 강도만큼 날이 선 저항으로 시위가 팽팽해진다. 그리하여 작가는 어린 시절 고향의 자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여유롭고 풍족한 공간의 기억을 소환하여 도회적인 회색의 공간에 있는 정물과 마주하게 한다. 깔끔한 접시 위에 생생한 빛깔의 과일들과 원초적인 색깔의 꽃들이 놓여있고 때로는 그 위에 어쩐지 낯익은 얼룩말들이 손에 닿지 않는 환영처럼 천연덕스럽게 서있다. 얼룩말들은 높은 채도의 색깔들이 백열(白熱)하는 사바나의 꽃밭이나 열대수림 위에도 등장하지만 그들의 원경에 펼쳐진 너른 여백은 이러한 풍경의 순도를 한껏 끌어올려 묘사된 대상을 정제된 갈증을 내뿜는 불가사의한 정물로 만든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막다른 세계에 대한 저항과 잃어버린 상상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극적인 방법으로 꿈이나 무의식이 빚어내는 괴이한 세계에 천착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수단을 너무 맹신하고 과도하게 추구한 나머지 결국 상상과 현실 사이의 견딜 수 없는 괴리에 빠져 양쪽에서 소외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작가 서영남이 접근하는 초현실적 상상의 세계는 먼 곳에 있는 동식물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차용함으로써 일견 낯선 분위기를 발산하면서도 어딘가 현실에 가까운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의 신비와 같은 티브이 화면에서 이미 익숙해진 대상들을 조합하여 나름 꽤 친숙한 풍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풍경은 다만 꿈이나 무의식의 소산이라기 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일반화된 이미지에서 차용된 현대의 도시적 일상에 간접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다. 그곳에는 문득 작가가 어렸을 때 빠져들었던 창공처럼 무한하게 펼쳐진 자연의 현실공간과 여러 매혹적인 대상들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던 꿈과 같은 이미지들이 작가가 현재 몸담고 있는 빽빽한 도시의 일상 속으로 백일몽처럼 되돌아온다. 퇴색한 현재와 생생한 과거가 겹쳐진다. 이로서 작가가 회귀하는 곳은 고향 속의 공간인 듯 하지만 기실은 고향의 시공을 딛고 일어나 구축한 또 다른 제3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작가가 그곳으로 탈출하는 일은 현재의 고갈된 일상 깊숙한 곳에서 단숨에 낙원의 한복판으로 도약하는 일이다.

그의 이국적인 얼룩말들을 비롯하여 당나귀나 치타 나비 등, 그 밖의 몇몇 다른 동물과 곤충 또는 화려한 색깔의 열대식물이나 꽃들은 이처럼 그들이 있어야 하는 열대 공간의 사바나쯤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도회적으로 고립되고 정제된 공간에 소외된 듯한 자세로 혼자 있거나 몇 마리 씩 무리를 지어 있다. 이는 일찍부터 고향을 떠난 작가가 그 동안 몸담고 있던 도시적 현실 공간에서 느꼈음직한 소외로부터 비롯되었을 어딘가 다른 친숙하고 평화로운 곳에 대한 뿌리깊은 열망을 투영한다. 그곳을 작가는 "달콤한 풍경"(sweet landscape)이라 이른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만큼이나 우리에게 떠나온 고향은 멀고도 달콤하다. 고향은 바로 저곳에 대한 이곳의 달콤한 욕망 속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사 없는 깔끔한 풍경은 오히려 그곳에 대한 무언의 그리움을 더한층 강화한다. 이 지점이 바로 작가가 구현해 낸 작품 속의 낯설고도 친숙한 공간과 세계가 자신의 진정한 고향이 되는 곳이다.

인간은 원시부족 때부터 생존에 필요한 동물들을 돌도끼나 창으로 직접 사냥을 해서 잡았다. 이 같은 행위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간접적인 교환행위로 바뀌었으며 오늘날 직접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몇몇 직업을 빼고는 대부분의 인류가 자신의 환경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먹거리를 화폐나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획득한다. 이러한 간접적인 수단을 통한 소유행위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이미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디지털 기기의 편의성에 힘입어 어느 곳에서든 우리는 원하는 이미지를 필요한 만큼 빛의 속도로 접할 수 있다. 그렇게 설렘이 없이 쉬이 얻어지는 것들은 진정으로 소유되지 못하고 발광다이오드의 빛이 명멸하는 디지털 기기의 화면 속에서 신기루처럼 시들어간다. 대량의 디지털 이미지들은 그토록 영혼 없는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데이터 파장을 타고 인간의 마음 밖으로 유령처럼 떠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 이미지를 유화물감과 붓을 통해 수작업으로 세심하게 그려냄으로써 디지털 기기에 의해 간접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이미지의 헛됨에서 벗어나 자신이 스스로 잡아서 건져 올린 건강한 이미지로서 수확하기에 이른다. 그러기에 비현실적인 듯한 분위기의 그림에는 역설적으로 작가의 실존적 현실이 촘촘하게 투영되어있다. 거기에는 늦은 오후의 거실에서 무심히 시청하는 티브이 속의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의 신비 등에서 문득 튀어나온 듯이 낯설지 않은 이미지들이 작가가 새로이 짜낸 옷을 입고 작가가 가꾸는 풍경 안에 기꺼이 참여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냥한 사냥감으로 차려진 풍성하고 맛깔스러운 식탁이다. 거기에 맴도는 작가의 끈질긴 허기는 결코 식탁을 떠나지 않을 강한 "아우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