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신체 트라우마와 상처에 관한 나의 작업은 몇 해 전의 사고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체적 고통과 장애는 그전의 작업들을 통째로 바꿀 만큼 큰 사건이었다. 상처는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무의식적 충격은 결코 지울 수 없는 공포였다. 결여의 빈 공간에서 태어난 틈을 나는 작품으로 메우고자 하였고, 작품을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 <동경><camouflage>(2020)은 현재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직면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하며, 불안과 결핍의 감정을 발견하고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 최근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외부로 확장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팬데믹이우울증, 불안증, 등의 빈도와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집단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지점을 파악하여 작품으로 연결시켜 나가고 있다.
내가 느끼는 슬픔이란 존재하는 것의 유한함에 대한 슬픔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란 사라져 가는 존재(육체)을 보존하고 치유하려는
일종의 자기 수행적 행위이다. 회화라는 매체는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은 회화가 시간을 들여서 긴 호흡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물성
을 이용해 끊임없이 덧바르는 행위를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생명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매체가 아닌 회화를 통해서 내가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있음'이라고 규정하였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다.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모종의 완성을 추구하는 듯한데 구체적인 실존적 결단들을 보면 늘상 불완전을 추구하는 듯하고, 시간적으로는 삶보다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고 죽음은 실존의 한계를 보여주는 지평선으로서 이 지평선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보다 ‘허무’에 대한 생각이다. 허무에 대한 이 의식은 ‘염려‘ ‘불안’ 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삶의 고뇌가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가 ‘죽음에 던져진 존재'이고, 우리의 실존이 죽음과의 관계를 통해 방향이 정해져 있음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의 근원을 개체가 자기 정체성과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고, 자아의 방어벽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고 정의한다. 심리적 외상 이후 그 기억은 마치 이물질처럼 마음의 바닥에 잔류하며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이것들은 창작으로 나를 이끄는 주요한 원동력이다. 불안전한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마주하며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트라우마도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형태를 바꾼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회상 53.0 x 53.0cm, oil on canvas, 2021
오후 5시, 116.8 x 91.0 oil on canvas, 2022
Prelude, 72.7 x 60.6 oil on canvas, 2021
회상, 53.0 x 53.0 oil on canvas, 2021
Camouflage,72.5x50.0 oil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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